슬픈 시 모음 #1

written by 뻬호
좋은 글· 2016. 3. 9. 18:54

「기뻤기에 지금은 너무 슬프기를, 그리고 슬펐기에 너무 기쁘기를.」


 

어느 시점에, 머지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총합보다 크다.

이는 수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가능하다.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중에서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 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박형진의 사랑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김선우의 낙화, 첫사랑 중에서

 

 

슬픔은 나약함이나 병이 아니라 애도 작업의 핵심이다.

애도 기간에는 슬픔을 극복하려 애쓸 게 아니라 슬픔과 함께 살아간다.

울음이 터진다면 참지 말고 자연스럽게 운다.

눈물이 나올 때마다 잠깐씩 울어도 좋고, 음악을 틀어놓고 크게 울어도 좋고,

아예 날을 잡아서 마음속에 있는 슬픈 감정들을 모두 떠올리며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어도 좋다.

 

김형경의 좋은 이별 중에서

 

 

이별이 아픈 이유는

우연히라도 너와 더 이상 마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내 삶의 반경이 움츠러들기 때문이다.

너에게 가는 데 익숙했던 발걸음을 다잡고

익숙한 거리를 피해 애써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하는 건

마치 관성을 거스르듯 자연의 법칙을 깨는 일이라

몇 배의 힘과 노력을 요하는 서툰 작업.

쓰지 않던 마음의 근육을 써서

너에게로 가려는 마음을 제자리로 당겨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애경의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 중에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자리하지 머릿속에 자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을 소유하고 싶을 때 머리가 앞서지요.

하지만 내가 대상을 소유하고 싶도록 만들지 말고

대상이 나를 소유하고 싶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세상만사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이외수의 사랑외전 중에서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남몰래 울며 하는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이 될까 몰라 

아픈 꽃이 될까 몰라

 

정희성의 시를 찾아서 중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 마디 말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박재삼의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중에서

 

 

남성들은 속을 보여줄 수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상대에게 내면의 두려움을 들키는 것이, 두려움 그 자체보다 더욱 두렵기 때문이다.

얕보일까봐. 그래서 필사적으로 강한 척을 한다.

사랑하는 여성에게는 더욱 그렇다.

남성은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여성에게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잘 해결된 다음에야 무용담으로 늘어놓는다.

 

한상복의 여자에겐 일생에 한 번 냉정해야 할 순간이 온다 중에서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이문재의 산책시편 중 푸른 곰팡이

 

 

그대여, 

이제 부디 나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라.

 

사랑에 배신은 없다.

사랑이 거래가 아닌 이상, 둘 중 한 사람이 변하면 자연 그 관계는 깨어져야 옳다.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게 후회로 남으면 다음 사랑에선

조금 마음을 다잡아볼 일이 있을 뿐,

 

죄의식은 버려라.

이미 설레지도 아리지도 않은 애인을 어찌 옆에 두겠느냐.

마흔에도 힘든 일을 비리디 비린 스무 살에, 가당치 않은 일이다.

가당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린 모두 오십보백보다.

더 사랑했다 한들 한 계절 두 계절이고,

일찍 변했다 한들 평생에 견주면 찰나일 뿐이다.

 

모두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다 괜찮다.

 

노희경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중에서

 

 

시는 청자의 상황이나 기분, 감정에 따라 느끼는 바가 많이 차이 납니다. 방금 이별한 사람이 기쁨을 노래하는 시를 보며 좋아할 리 없고, 이제 막 싹튼 사랑을 하는 사람은 이별의 아픔이 생생하게 전달되지 않죠. 슬플 때는 슬픈 노래, 슬픈 글, 슬픈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고 훌훌 털어버리는 게 제일입니다.

나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마시고 그대로 그 슬픔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세요. '내가 이만큼 슬프구나. 이 정도로 슬프면 이렇게 아프구나. 슬픔이 내속에 아직도 있구나.' 참 말로만 떠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슬픔 또한 나 자신입니다. 나를 알아가면서 내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존재하고, 악이 있어야 선이 있는 만큼 당신의 슬픔은 반드시 기쁨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반드시.


슬픈 시 모음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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